삶묵상2018. 2. 7. 08:35

W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여태까지 율법을 알지도 못했고 지키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잘 차려진 상에 숟가락 하나 올린 격이니 배가 아플만도 하다. 유대인들이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폈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는 커다란 혼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 교회 성도 몇이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토론을 하였다.  베드로는 역시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이방인에게 전도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체험한 그는 율법이 없어도 예수님의 은혜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율법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이미 잘 아는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율법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안디옥, 베니게,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는 동안 바울 일행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형제들과 나누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더 견고하게 서가며 복음 증거에 열심을 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M

우리도 잘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가?

율법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율법적 행위를 강요하지는 않는가? 특히 교회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규칙을 만들고 이것을 지키는 것이 신앙좋은 사람이라 여기는 풍토는 재고해보아야 한다.

사역을 나누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이 성도를 격려하는 데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조심할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때문이다.

이방인 선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이와 병행하여 생겨나는 신학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독선이 아니라 충분한 의논과 토론을 통해서였다.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갈 때 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자


P

주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베푸신 한없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접붙힌 바 되어 주님의 가지와 한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형제를 용납하게 하시고 나도 잘 못하는 것을 강요하는 미련한 짓을 관두게 하소서. 다만 하나님의 하신 일만을 선포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생긴 갈등을 충분한 대화로 풀어가게 하시고 막힌 담을 허시는 주님의 중재를 소망합니다.아멘!

사도행전15장 1-11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2. 5. 09:17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의 선동은 두 사도의 목숨을 위협했고 그들은 루스드라로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고,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두 사도가 제우스와 헤르메스라 여기고 제사를 드리려 했다. 사도들은 옷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 유대인들의 악감: 모든 사람이 같은 편일 수가 없듯이, 누군가를 나(우리)를 반대하기 마련이다.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위협을 주기도 한다. 나는 그저 내 할일을 했을 뿐인데, 그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대적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사도들처럼 도망하여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 앉은뱅이의 구원: 사도들은 그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일어서라고 외쳤다. 병자는 많지만, 구원받을 만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환자라도 고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고쳐야할 사람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질병에서 해방되어 고통을 더는 것보다 더 훨씬 큰 목표가 있으신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다. 구원은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그분께 우리의 생명을 맡김으로써 이루어지는 회복을 의미한다.

-- 신이라 칭송을 받았을 때: 헤롯왕은 자기가 한없이 높아져 벌레가 먹어 죽어버렸는데, 두 사도는 달랐다. 사람들이 안 믿을까봐 옷을 찢고 소리를 지르며,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외쳤다. 이런 행동을 통해 높아진 것은 하나님 한분 뿐이었으며, 이로 인해 구원의 복음은 더 확실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 

사도들이 목숨의 위협이 무서워서 이고니온을 떠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시대를 분별하게 하시고 있어야할 곳을 민감하게 깨달아 알 지혜를 주셔서 주님이 부르신 그곳에 서있게 하소서. 

저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주셔서 지금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주님의 손길로 알아 살려주시기를 구하게 하시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이 위기를 이겨내게 하소서.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 때문이니 스스로를 높이지 말게 하시고, 나의 삶의 전 영역을 통해 주님의 높으신 이름만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사도행전 14장1-18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31. 10:14

사도행전1218-25


W

베드로가 옥에서 사라진 일로 경비병들이 죽고 혼란에 빠진 헤롯 아그립바는 예루살렘 북서쪽 104km 떨어진 가이사랴(그 당시 로마의 총독관저가 있었던 곳이며 백부장 고넬료가 있었던 곳)로 떠났다.

헤롯은 곡물 수출을 끊겠다는 위협을 당해 화해하러온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의 아첨을 듣고 그 영광을 자신이 받고 죽었다.

하나님 말씀은 더 널리 퍼져갔다.

M

헤롯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그의 박해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중단하고 가이사랴로 옮긴 것은 베드로의 일로 심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는 죽고 말씀은 더 퍼져가게 되었다.

왕좌에 앉아 빛나는 옷을 입은 헤롯은 사람들의 아첨에 만족해하며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제자들이 원주민들이 신이라고 추앙할 때 옷을 찢으며 만류한 것과 대조적이다.

P

주님, 헤롯이 왕의 지위를 이용해서 교회를 핍박하였지만, 주님은 복음이 더 왕성하게 퍼져나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싶지만, 많은 사람이 저를 힘들게 하고 훼방하곤 합니다. 낙심하여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온 우주의 왕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해주소서.

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을 때가 잦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은 주님이신데, 그 영광을 가로챈 교만을 용서하시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 높이게 해주소서. 아멘!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30. 09:55

사도행전121-17


W.

헤롯 왕가는 3대에 걸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다. 헤롯 아그립바왕은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더 박해를 가했는데,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유대인과 뜻이 맞아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AD 42년경 사도 중에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를 목격할 만큼 사도 중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잡혀 옥에 갇혔고, 이 한 사람을 지키려고 4명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섰다.

그러나 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기적은 이런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렸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베드로는 유유히 걸어나와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던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사람들은 역시 베드로의 탈출을 믿지 않았다.


M.

베드로에 옥에서 풀려난 사건은 많은 성도에게 알려졌고, 헤롯왕(예수님 탄생하실 때 어린아이를 죽인 왕의 손자)과 유대인들이 가해오는 조직적인 핍박에 대해 복음의 능력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확신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P.

주님, 지금 세상은 조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고 복음이 더는 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의 수장인 베드로가 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채 꼼짝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불편해하지도 않고 잘 지내는 저의 모습이 더 심각한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왕과 유대인이 제자들을 핍박했듯이 나라와 국민은 조직적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고 있어서 주님의 교회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지는 역사는 제가 그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많은 성도의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고백하고 철저히 그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저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주님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29. 08:54

사도행전 932-43

W

룻다의 애니아: 중풍 8, 누워지냄. 베드로가 일어나라 하니 일어났다.

애니아(이름은 여자같으나, 남자임)라는 이름은 칭찬받는자라는 뜻인데, 그곳 성도들은 그를 돕기 원해서 베드로를 데리고 갔던 같다.

8 동안 누워 있었다면 아무리 신경이 정상으로 회복된다 해도 위축된 근육으로 즉시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일어나 자리를 정돈한 것으로 봐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있을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목격하고 들어 알게 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왔을 것이다.

 

욥바의 다비다(도르가: 사슴이라는 ) 여제자, 병들어 죽어 눕혀 있었다.

욥바는 룻다로부터 서편으로 14.5km 떨어진 도시로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사람을 시켜 속히 와달라고 부탁했고, 베드로를 그녀가 누워있는 다락방으로 인도했다.

과부들이 다비다가 만들어준 옷가지를 보여줬다.

내보내고, 베드로가 기도했고, 일어나라고 선포하였다.

다비다는 살아났고,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다.

 

M

룻다의 애니아의 병을 고치고, 욥바의 다비다를 살리고 나서 나타난 결과는 공통으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것이었다. 병과 죽음이라는 문제가 해결된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영혼 구원이다. 베드로의 고치는 사역은 결국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었다.

 

P

주님,

해결 불가능한 8년된 중풍이 순간에 나아 온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무슨 속임수가 있다며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며 관심조차 갖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도 문제지만, 신뢰를 잃어버린 기독교는 심각합니다. 주님께서 도저히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추락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저에게도 믿음을 주셔서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소서. 어떤 일을 하든 일의 결과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저의 삶의 모든 영역이 복음으로 물들어 오직 예수님만 증거되고 많은 사람이 전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당장 닥친 시급한 문제는 복음을 널리 전하려고 펼쳐두신 주님의 계획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담대하게 구하게 하시고 사람을 살리는 사랑으로 행하게 하소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29. 08:06

사도행전 11 1-18


W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 사역을 하고 돌아온 베드로는 교회의 비난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와 성령께서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역사 하셨음을 설명하였고, 신자들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M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길은 도보로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발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힘들게 다녀오는 그의 모습은 그곳에서의 놀라운 사역을 통해 성령이 충만해있었을 텐데, 그를 맞이한 교회 성도들의 반응을 싸늘하기만 했다.

그들이 비판하는 주된 내용은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교제하였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갇힌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여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억지였다. 아마도 자신들이 가장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자신들과 다르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려는 태도에서 생긴 비난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설명을 다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방인을 향해서도 복음의 문이 열렸음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절에 권능을 받아 온 유대와 사마리아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모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보았다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베드로를 비난하는 모습은 마치 미련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내는 열심이 도리어 성령의 역사를 막아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우매함을 다 덮을 수는 없다. 깨어 기도하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역사 하셔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역을 인정해 드리자.


P

오늘 귀한 날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잘못된 열심이 도리어 주님의 복음 사역을 훼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회개합니다. 형제의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었는데, 제가 옳고 그들이 틀렸다고 섣부른 판단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해 드리고 다만 주님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22. 08:58

사도행전9장10-19a


W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성도들의 핍박자 사울을 위해 가서 기도해주라는 주님의 부탁을 받았다. 사울의 소문을 익히 알았던 아나니아는 머뭇거렸으나, 순종하여 가서 기도하였고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다. 


M

왜 사울이 눈이 멀게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고,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제자 아나니아를 시키셨을까?

사울은 주님이 부르신 큰 복음의 사역자 였다. 사울의 사역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교회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가장 먼저 그가 핍박하던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일이 중요했다. 


아나니아의 순종은 목숨을 건 대단한 일이었다.

아나니아가 알고 있는 사울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인물이었고, 주님의 부탁을 듣고서 여러 말로 가기가 어렵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순종하여 찾아갔고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며 다시 보게 해주었다. 정말 가기 싫었을 텐데, 주님이 그려주신 큰 그림을 보고 순종하여 나아간 결과 사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P

사랑의 주님, 제 주변에는 상종하기도 싫고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도 사랑하신다 하셨는데,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살리시려는 한 영혼이 눈이 멀어 사흘을 식음을 전폐하고 마음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다가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억지로 외면하려는 저의 불순종을 용서하소서. 

사울은 나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길을 가다가 앞을 못보는 소경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자업자득이라며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심지어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위대한 전도자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가 우리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주님이 베푸신 배려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는 늘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되길 원하면서도 그가 당한 고난은 애써 외면하곤 하였습니다. 차라리 겸손하게 아나니아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어 형제를 높여주며 그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든든하게 세움을 입도록 돕는 자가 되게 하시고,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는 Peacemaker가 되게 해주소서. 

오늘 하루의 삶도 싫어도 기꺼이 순종하여 사람을 세운 아나니아를 본받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8. 1. 19. 09:02

사도행전814-25


W

빌립의 사마리아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소식은 예루살렘의 두 지도자를 사마리아로 파견하게 하였다.

마술사 시몬은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13)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의 사역을 지켜보았는데, 그의 관심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행하는 능력에 있었다. 두 사도가 기도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돈으로 그런 능력을 사려고 하였다가 그 악한 생각을 회개하라는 권면을 받게 된다.


M

버려지고 소외된 땅 사마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은 빌립 한 사람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성이 기뻐하고 성령 세례를 받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멸시 천대하였고, 가장 시급한 선교지였다.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이 못한 일을 빌립 집사가 감당한 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과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는 시몬은 오늘날의 교회와 비슷한 점이 있다. 교회는 경영되고 있으며 행사는 기도가 아니라 돈으로 치러진다. 규모있는 운영을 위해 재정부가 있고, 예산을 세우고 집행을 한다. 모양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데 내용은 기독교 기업이다. 그러다 보니 일만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함이 교회에 많아져 말하기도 부끄러운 많은 비리가 연일 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개독교가 되어가고 있다. 시몬에게 내린 사도들의 처방은 1) 죄에 빠져 있음을 각성하라 2) 회개하라 였다.

시몬의 가장 큰 문제는 돈으로 그런 능력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에게 베푼 능력으로 인정을 받아왔고 자신의 방법이 통했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게 문제였다.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 한번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


P

주님,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사업장이나 기업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이 바로 돈으로 주님의 능력을 살 수 있으리라는 저의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과 쌓아온 경험을 십자가에 못박을 용기를 주소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오직 주님만 살아계시오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만을 드러내는 생활 신앙을 갖게 하소서. 오늘도 소외당하는 이웃을 위한 기쁜 소식을 나눌 결단을 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말씀을 들어야 하는 한 영혼을 찾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7. 10. 11. 11:19

예레미야에게 띠를 띠게 하였다면 그 상징행위를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대속죄일에 제사장은 회막 안에서 일하기 편하게 세마포로 된 띠를 띠고 일했었다.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의 선지자이었고, 띠를 띠게 하셨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띠었던 베 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림 출처: http://blog.daum.net/mugue/18320382


만약 이 띠가 없다면 제사장은 치렁거리는 옷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제대로 된 제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제사장이 제사를 다 지내고 나와서는 색이 화려한 에봇 겉옷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 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렘13:11(중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띠 같은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이 띠를 유브라데 강가의 깊은 바위틈에 둠으로 썩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위 사진에서 띠가 없는 치렁치렁한 옷을 상상해보라. 

어떻게 제사장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1,000 km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왕복하였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교만이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렘13:9


예루살렘의 교만은 유다의 것보다 더 큰 교만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교만보다 교회의 교만이 더 크고, 교회의 교만보다 목사와 장로의 교만이 더 크다는 말이다. 


내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가장 교만한 자이다. 


내가 주님의 띠가 되어 그분의 허리춤에 붙어 있다면 가장 아름다울 텐데, 

거기가 아니어도 좋다며 바벨론의 이방신을 좇아 교만함으로 띠를 썩게 놔둬버린다면,

내 안에서 어찌 그분의 이름과 명예과 영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금 험난하게 돌아가는 나라의 정국과 경제난은 많은 사람을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땅에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염려가 많아지는 것이

바로 내 책임이 아닌가?


내가 그분의 썩지 않는 띠가 되어

깨어 기도하고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한다면

더 많은 생명이 주님께 돌아오리라. 


그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예레미야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도저히 듣지 않는 강퍅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중보기도를 하였을까....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7. 10. 6. 10:15

치유될 수 없는 상처와 멸망, 그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에게 이렇게 외치신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이미 치유의 기회는 잃었다. 그동안 수많은 권고와 당부의 말과 교훈이 있었지만, 누구고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당하는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집행하는 분의 입장도 안타깝기만 하다. 

사랑하는 백성을 괴롭혀야하는 마음을 생각해보았는가?


깨닫게 해야겠다. 이 한가지 목표를 이루시려고 그들을 고난 가운데 두셔야만 했다. 


선지자는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 있다.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너그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미쉬파트 인데, 이는 판결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딱 그만큼만 벌을 달라는 말이다. 

만약 화를 내시면 그 엄청난 재앙을 감당할 수 없기때문에 공의롭게 판결된 대로만 벌주시기를 선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이 번잡하고 죽을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단지 부탁드릴 것은 이 것 밖에 없었다. 




사람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걸어도 내 길이 아니요, 

내가 방향을 정하여 가는 것 같아도 그 걸음을 지도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주께 맡긴다면 

한걸음 한걸음을 두려움으로 내딛어야 한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이끄시도록 기도하면서 나아가야한다. 


내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분께 기쁜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텐트를 탄탄하게 당겨주던 끈이 다 끊어진다면 누가 그 텐트에 머물 수 있겠는가?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이 양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어느 양이 남아있겠는가?


이렇게 망하여 흩어지는 공동체를 목격하기 전에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늘을 향해 외치는 성령의 기도 소리를 들어라. 


내 깊은 심연에서 들려오는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 삶이 변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시대 2017년 10월이다. 





렘10:17~25

Posted by 소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