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에게 띠를 띠게 하였다면 그 상징행위를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대속죄일에 제사장은 회막 안에서 일하기 편하게 세마포로 된 띠를 띠고 일했었다.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의 선지자이었고, 띠를 띠게 하셨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띠었던 베 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림 출처: http://blog.daum.net/mugue/18320382
만약 이 띠가 없다면 제사장은 치렁거리는 옷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제대로 된 제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제사장이 제사를 다 지내고 나와서는 색이 화려한 에봇 겉옷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 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렘13:11(중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띠 같은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이 띠를 유브라데 강가의 깊은 바위틈에 둠으로 썩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위 사진에서 띠가 없는 치렁치렁한 옷을 상상해보라.
어떻게 제사장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1,000 km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왕복하였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교만이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렘13:9
예루살렘의 교만은 유다의 것보다 더 큰 교만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교만보다 교회의 교만이 더 크고, 교회의 교만보다 목사와 장로의 교만이 더 크다는 말이다.
내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가장 교만한 자이다.
내가 주님의 띠가 되어 그분의 허리춤에 붙어 있다면 가장 아름다울 텐데,
거기가 아니어도 좋다며 바벨론의 이방신을 좇아 교만함으로 띠를 썩게 놔둬버린다면,
내 안에서 어찌 그분의 이름과 명예과 영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금 험난하게 돌아가는 나라의 정국과 경제난은 많은 사람을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땅에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염려가 많아지는 것이
바로 내 책임이 아닌가?
내가 그분의 썩지 않는 띠가 되어
깨어 기도하고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한다면
더 많은 생명이 주님께 돌아오리라.
그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예레미야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도저히 듣지 않는 강퍅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중보기도를 하였을까....
'삶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나아, 다비다를 일으키신 것은 복음을 위함 (0) | 2018.01.29 |
---|---|
사역을 거스르는 교회의 잘못된 비판 (0) | 2018.01.29 |
공동체의 피스메이커 (0) | 2018.01.22 |
기업이 된 교회 (0) | 2018.01.19 |
[예레미야 10장]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고통가운데 한가닥 희망을 붙들고 기도하라 (0) | 2017.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