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묵상2017. 10. 11. 11:19

예레미야에게 띠를 띠게 하였다면 그 상징행위를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대속죄일에 제사장은 회막 안에서 일하기 편하게 세마포로 된 띠를 띠고 일했었다.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의 선지자이었고, 띠를 띠게 하셨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띠었던 베 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림 출처: http://blog.daum.net/mugue/18320382


만약 이 띠가 없다면 제사장은 치렁거리는 옷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제대로 된 제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제사장이 제사를 다 지내고 나와서는 색이 화려한 에봇 겉옷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 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렘13:11(중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띠 같은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는 이 띠를 유브라데 강가의 깊은 바위틈에 둠으로 썩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위 사진에서 띠가 없는 치렁치렁한 옷을 상상해보라. 

어떻게 제사장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1,000 km가 넘는 거리를 두 번이나 왕복하였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교만이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렘13:9


예루살렘의 교만은 유다의 것보다 더 큰 교만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교만보다 교회의 교만이 더 크고, 교회의 교만보다 목사와 장로의 교만이 더 크다는 말이다. 


내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가장 교만한 자이다. 


내가 주님의 띠가 되어 그분의 허리춤에 붙어 있다면 가장 아름다울 텐데, 

거기가 아니어도 좋다며 바벨론의 이방신을 좇아 교만함으로 띠를 썩게 놔둬버린다면,

내 안에서 어찌 그분의 이름과 명예과 영광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금 험난하게 돌아가는 나라의 정국과 경제난은 많은 사람을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땅에 평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염려가 많아지는 것이

바로 내 책임이 아닌가?


내가 그분의 썩지 않는 띠가 되어

깨어 기도하고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한다면

더 많은 생명이 주님께 돌아오리라. 


그 먼 거리를 왕래하면서 예레미야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도저히 듣지 않는 강퍅한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중보기도를 하였을까....







Posted by 소겸
삶묵상2017. 10. 6. 10:15

치유될 수 없는 상처와 멸망, 그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에게 이렇게 외치신다.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이미 치유의 기회는 잃었다. 그동안 수많은 권고와 당부의 말과 교훈이 있었지만, 누구고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당하는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집행하는 분의 입장도 안타깝기만 하다. 

사랑하는 백성을 괴롭혀야하는 마음을 생각해보았는가?


깨닫게 해야겠다. 이 한가지 목표를 이루시려고 그들을 고난 가운데 두셔야만 했다. 


선지자는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 있다.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너그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미쉬파트 인데, 이는 판결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딱 그만큼만 벌을 달라는 말이다. 

만약 화를 내시면 그 엄청난 재앙을 감당할 수 없기때문에 공의롭게 판결된 대로만 벌주시기를 선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이 번잡하고 죽을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단지 부탁드릴 것은 이 것 밖에 없었다. 




사람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걸어도 내 길이 아니요, 

내가 방향을 정하여 가는 것 같아도 그 걸음을 지도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주께 맡긴다면 

한걸음 한걸음을 두려움으로 내딛어야 한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이끄시도록 기도하면서 나아가야한다. 


내 걸음을 지도하시는 분의 뜻에 합당하다면, 

그분께 기쁜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텐트를 탄탄하게 당겨주던 끈이 다 끊어진다면 누가 그 텐트에 머물 수 있겠는가?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이 양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어느 양이 남아있겠는가?


이렇게 망하여 흩어지는 공동체를 목격하기 전에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늘을 향해 외치는 성령의 기도 소리를 들어라. 


내 깊은 심연에서 들려오는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내 삶이 변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시대 2017년 10월이다. 





렘10:17~25

Posted by 소겸